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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19 13:49
단편소설 서기골 로반(2) 김정애
 글쓴이 : 이지명
조회 : 403  

 

철규가 들어서며 소개하자 남자가 손질하던 도끼자루를 놓으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철규는 한아바이가 앞니가 한 대뿐이어서 그렇게 불리지만 실제 나이는 40대 초반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넷이서 저녁식사를 마치자 철규는 이제야 식구가 늘어 주패(카드)를 칠 수 있게 됐다며 자리를 폈다. 주패장이 오가며 서로에 대한 소개가 시작됐다.

 

한 씨의 이름은 한상길이다. 한때 인민군 땅크부대에서 중대장이었던 그는 제대하면서 약혼한 여자 친구를 고향으로 데려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고난의 행군이 닥치며 먹을 것을 구하려 나간 아내는 종내 돌아오지 않았고 하나뿐인 아홉 살짜리 아들마저 엄마를 찾아 떠난다며 집을 나갔다. 몇 달째 돌아오지 않는 식구들을 기다리던 상길이도 결국 국경을 넘어 여기저기를 찾아 헤매던 끝에 이곳 서기골에 눌러앉아 겨울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좋은 때 좋은 날 맺어진 사랑/ 한쌍의 꽃으로 활짝 피었네/

축복하노라 오늘의 새 가정/ 축복하노라 오늘의 이 행복/

 

결혼식날 부대 친구들이 불러준 결혼축가라며 중얼거리던 상길은 흑 콧물을 들이키며 팔소매를 눈가에 가져갔다

 

아직 30대인 철규는 자신을 소개할 때 패쪽을 힘껏 내리쳤다. 어느 외화벌이 회사의 해외수출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회사자금의 손실을 책임지고 지배인이 갑자기 총살당하는 바람에 놀라서 홀몸으로 북한을 탈출했다고 한다. 저녁마다 아빠의 목에 매달려 깔깔대던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놓고 인사도 없이 급히 떠나던 그 날을 떠올리며 철규는 일그러진 얼굴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두 개의 촛불이 다타 접시에 가득 녹아내리고 남은 심지가 잦아들 때까지 고향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보아하니 나보단 이상인 것 같은데 형은 대체 어쩐 일루?” 이번엔 철규가 물었다.

 

두툼하게 말아 문 담배를 빨며 주패장을 들여다보는 덕만이 뜸을 들이자 순옥이가 나섰다.

이 이도 철규삼촌과 거의 비슷해요. 군에서 고위간부였던 형님이 어느 날 정치범이 되어 잡혀가는 바람에 부득불 탈출할 수밖에 없었어요. 동생도 잡히면 정치범수용소행이잖아요.”

 

애들은, 없소?”

저의 친정에 맡겼는데 자리가 잡히면 곧 데려와야지요. 어때요 여긴 안전해요? 이인 절대 잡히면 안 되는 사람이라서

안전 같은 건 하늘에 맡겨야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여긴 당서기의 산이자 또 서기의 관할지역이니 그런대로 다른 곳보다 안전하다고 봐야지요.”

근데 아까 골짜기 입구에는 왜 나와 계셨어요?”

 

처음 만났을 때 실타래를 쥐고 서있던 철규의 눈빛은 극한 경계심을 내비치고 있었었다.

, 보안장치를 하느라고, 안전은 스스로 지켜야 하니까. 내가 창안한 거요.”

손에 쥐었던 바느실로 보안장치를 한다고요?”

순옥의 말투와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저길 보구레. 저 천정에 걸려있는 퉁재(둥근 쇠통)에 매단 쇳덩이가 골짜기 입구까지 늘인 실에 연결됐소. 누구든지 여길 오려면 그 길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풀대에 가로지른 실이 발치에 걸릴 거고 실이 끊기면 자연히 쇳덩이는 쇠퉁재에 떨어지게 돼있고. 요란한 소리에 우리는 그 사이 피할 시간을 얻게 되는 거구 흐흐

철규는 자신이 고안한 보안장치를 설명하면서 만족한 듯 웃었다.

 

매일 그렇게 해야 하나요?”

안전하게 살자면 날마다 그래야지. 어느 순간에 공안이 들이칠지 모르니까. 며칠 전에도 저 아래 탁근네 산창을 공안이 들이쳐 그곳에 있는 탈북자들 다 잡아갔소. 해마다 설밑에는 따스포(대 검거선풍)기간이요. 여기도 언제 올지 모르니 순간이라도 긴장을 풀면 안 되오.”

 

철규는 벽에 걸려있는 배낭을 가리키며 만약의 경우 뛰쳐나가며 갖고 갈 비상용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어떤 위험한 순간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빨치산 유격전법을 잘 배워둔 것 같아요.”

그렇죠. 조선에서 배운 김일성혁명역사학습이 오늘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지요.”

저들의 탈북이 현재형 항일무장투쟁시기 빨치산을 닮았다며 모두들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새로운 고향소식을 이것저것 자꾸 물었다. 흔들리는 촛불아래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로 서기골의 겨울밤은 깊어갔다. 그러다가 눈을 붙인지 두 세 시간 쯤 지났을까,

 

쟁가당, 가마뚜껑이 깨지는 것 같은 요란한 쇳소리가 고요한 새벽공기를 찢는다. 새벽 네 시다. 로반이 산창에 올라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소동이라고 엊저녁에 철규가 말했다. 병적 발작처럼 새벽 네 시만 되면 난리법석을 피운다는 로반은 오늘도 마치 시계 초침을 붙들고 있은 것처럼 에누리 없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손에 든 전지불로 컴컴한 방안구석을 이리저리 비쳤다. 그녀의 소란에 구들에 깔린 두꺼운 이불이 꿈틀거렸다.

 

아직도 누워있으면 어쩌자는 게야? 지금 몇 시야. 빨랑 일어나

 

뒤이어 로반이 가마뚜껑을 닥치는 대로 콘크리트바닥에 모두 내동댕이쳤다. 문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깬 순옥은 깜짝 놀라 토끼처럼 튕겨 일어섰다. 어제 이곳에 도착하면서 철규에게서 대충 듣긴 했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정신이상증세에 가까운 로반의 행동에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에이, 또 시작이네. 이보오. 로반, 오늘만이라도 좀 조용하시구레. 새 사람들도 왔는데......”

그러게. 좀 조용히 삽시다. 에익, 이거라구야 맨날 시끄러워서 원

피곤에 절은 철규의 말에 그 옆에서 잠이 덜 깬 상길의 목소리가 겹친다.

 

뭐야? 누가 누구더러 조용하라 마라야? 밥도 짓고, 짐승도 먹이고. 나무도 패고. 할 일이 태산인데 언제까지 자빠져있을 건데?”

여자의 발작적인 쇳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하면 되지 않소? 지금까지 그 일을 우리가 다 했지 누가 했는데

 

악에 받친 로반의 말에 철규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맞받아쳤다.

, 내 잔소리가 없어도 잘은 하겠다. 이래가지고 소, 돼지물을 언제 끓이고 오리, , 토끼는 또 언제 먹이고, 밖에 일은 언제 하냐고? 말 같은 소릴 해. 노루꼬리 만 한 해에 게으름이나 필거면 내 집에서 당장 나가던가! 입에 들어가는 쌀이 뭐 공짜야

 

로반이 그쯤 나오자 방안이 물 뿌린 듯 조용해 졌다. 더 맞받아 쳐봤자 소용없는 짓이어서 로반이 가마뚜껑을 몇 번 더 들었다 놓아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순옥은 얼른 찬장위의 촛대에 불을 붙였다. 촛불에 난장판이 된 가마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휑하니 열린 가마솥에 뚜껑을 덮는 순옥이를 째려보던 로반이 쌩하고 나간다.

 

정월의 설한풍이 로반이 열어놓은 문을 통해 휙 밀려들었다.

저건 잠도 안자고 꼭 새벽 네 시만 붙들고 지랄이야 지랄이. 여기가 조선이라면 저걸 그저 콱

잠자코 있던 철규가 로반이 나간 출입문에 대고 빈 삿대질을 해댔다.

에이 관둬 일도 없는 년이 잠이 올게 뭐야. 맨날 우리랑 저 지랄하는 멋으로 살겠지. 로반이잖아, 로반. 허허 차암......”

한 씨가 로반이란 말을 거듭 곱씹으며 비아냥댄다.

 

로반남편이 중환자라더니 그거 만족을 못주는 모양이야. 그렇잖으면 잠이 안 올 리가 있나? 저렇게 발광하는 데는 분명 뭐가 있어. 밤일을 못하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원한 같은......”

남편? 그냥 돈을 보고 붙어살겠지, 파파 삭은 늙다리에게 남 녀 간의 뜨거운 밤은 없을 테고. 젊고 얼굴이 반반한 게 할아버지 벌을 남편이라 해야 하니 때로 미치도록 악이 나겠지

 

그래. 로반이 30대 한창 나이에 참 안됐어, 로반이면 뭘해. 남편이라는 작자는 스무 살도 훨씬 많은 데다 언제 꼴깍할지 모를 병달이니, 내놓고 말은 못해도 속이야 지지리 썩겠지

남자들은 저마다 로반 앞에서 할 수 없었던 말들을 사정없이 들먹인다. 솥뚜껑이 머리에 떨어지는 줄 알았던 순옥이의 가슴은 아직도 쿵쾅쿵쾅 방망이질이다.

 

철규가 동복을 껴입고 먼저 도끼와 물 바께쯔를 들고 문밖을 나섰다. 칠흑같이 어두운 숲속을 지나 도착한 개울에는 언제 물이 흘렀냐싶게 두꺼운 얼음이 깔려있다. 널려있는 얼음덩이를 보고 간신히 얼음구멍을 찾을 수 있었다. 설이 가까워지면서 매서운 한파에 개울물은 어제보다 더 두텁게 얼어있다. 쩡쩡 얼음을 깨느라 휘두르는 도끼소리가 고요한 산정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마당 한편이 훤히 밝았다. 돼지죽을 끓이려고 나온 상길이가 마당 한쪽에 있는 야전가마에 불을 지피고 언무와 배추를 썰어 넣고 있다. 이어 소우리 쪽에서도 소 방울소리가 절렁거린다. 덕만이가 소여물을 만드느라 해머로 대두박을 부시고 뜨거운 물에 불리느라 양손에 쇠퉁재를 들고 부지런히 우사를 들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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