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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8-05 13:53
인간의 운명-장해성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3,286  
NK-PEN | 2014-06-28 22: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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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해성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
평양 출생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

조선중앙방송 정치교양국 기자, 문예총국 드라마작가

1996. 5월 대한민국 입국

1996.11-2006.11 국가 안보 통일정책 연구소 연구위원 근무

 인간의 운명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김혜순, 그는 이미 인생의 황혼 길에 들어선 노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대단한 미색이었지만 길고 험난한 인생길에서 다 소진되어 버리고 그 후광만 얼굴 구석구석에 약간씩 남아있을 뿐이다.

북한중앙방송 정치교양국기자였던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980연대 중후반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투사동지께서는 열일곱 살에 혁명의 길에 나서시었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랬지, 그 때에야 정말이지 무슨 철이 있었겠나. 하지만 그래도 우린 그때 총을 메고 왜놈들과 싸우려 나섰던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어린 나이에 왜놈들과 싸울 생각을 하였던 겁니까?”

 

“글쎄 뭐라고 할까. 아무튼 경신년 토벌에 우리 집에서는 열두 식구 중에 둘만 남았네. 하루아침에 온 식구가 몰살당했지, 연길 후투자골이라는 데서 살았는데 어느 날 이모하고 왕청에 있던 큰집에 갔다 오니 밤새 토벌대가 들이 닥쳐 온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더라구. 우리 동네가 뭐 독립군 소굴이었다는가.”

“독립군 소굴이었다구요?”

 

“그래. 경신년 가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이 힘을 합쳐 화룡 청산리에서 큰 싸움을 벌이지 않았나. 그 싸움에서 일본 놈들이 되게 얻어터졌어, 가만 있을 수 없었겠지, 왜놈들은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관동군까지 끌어들이고 거기다 조선국내에 있던 나남 19사단까지 합쳐 말하자면 간도 토벌이라는 것을 진행시켰던 거야.

그때 북간도의 마을과 사람 사는 곳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고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어. 그 통에 우리도 하루밤새 온 가족을 다 잃고 말았어.”

 

“그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긴, 그 넓으나 넓은 만주 들판에 우리 둘만 살아남았으니 그땐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했네, 이모와 나는 다시 왕청 친척집을 찾아갔지, 거기 밖에 더 갈 데가 없었으니까, 결국 거기서 그 마을이 온통 혁명 바람에 휩싸이는 통에 우리도 결국 그 길에 들어서고 말았지”

 

그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있는 이른바 항일투사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때는 벌써 지난 날 김일성과 같이 만주에서 항일했다는 사람들도 불과 몇 남지 않은 때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환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김정일 체제출범에 반대했다가 제명에 못살고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살아남은 항일 투사라는 사람들도 몹시 소심해져 특히 김일성의 항일 내막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랬지만 투사아파트에는 아직 “뙤뙤 나팔” 김자린, “따곰” 강위룡 그리고 유경수(유삼손)의 아내인 황순희, 불사조 리두수 등은 남아 있었다.

그들 모두가 당시 70-80을 넘긴 노인이었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뭐가 두려운지 기자들이 함부로 그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꼭 중앙당 당 역사 연구소의 승인을 받아서만 만나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갖가지 거짓말이 들어날까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어렵게 마주앉았는데 그도 처음에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니 자넨 뭘 알고 싶다고? 김일성과 김정숙이 어떻게 같이 살게 되었는지, 그걸 알고 싶다했나?”

 

“예, 하지만 이건 어느 신문에나 방송에 내자는 게 아닙니다. 진실을 알고 싶어 그럴 뿐입니다”

“진실이라, 여차하면 자네뿐이 아닌 여러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봤나?”

“알고 있습니다.”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많은 시일이 지나서야 나는 끝내 여 투사의 입을 열수 있었다.

“임자들은 항일 무장투쟁이다 하면 그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늘 왜놈토벌대들에게 쫓겨 다니고 굶고 떨고 그런 줄만 알겠지?”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영화에서 본 것도 다 그런 것들뿐인데요”

 

“물론 그렇긴 했지,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서 늘 그렇게 굶고 배고프고 언제 죽을지도 모를 위협에 시달린다면 누가 그 짓을 하겠나. 아무리 명분이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말일세. 사실대로 말하면 집단부락이나 왜놈 목재소 같은 걸 하나 제대로 치면 며칠은 정말이지 배를 두드리며 잘 먹는 때도 있었어. 그 멋이 없다면 십여 년씩 산에서 싸우기가 힘들었을 거야.”

 

“예에 그렇군요.”

“물론 힘들고 배고프고 죽음은 늘 눈썹 끝에 달고 다녔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자네 그 때 김일성이 어땠는가 물었더라?”

“예, 정말 지금 우리 출판보도물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때에도 그렇게 대단한 분이었는지부터 알고 싶습니다.”

 

“글쎄 한마디로 말하면 뭐라고 할까. 무서운 사람이었던 건 사실이야. 눈이 쭉 째진데다 덧 이빨까지 턱 나와 있는 사람이 눈을 한 번 부릅뜰 때에는 정말이지 웬만한 사람은 그 앞에서 오금이 얼어붙었다니까.”

 

그런 말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인가 항일무장투쟁 때 김일성의 좌청룡 우 백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오백룡이를 취재하면서도 그런 말은 들었었다.

 

“그렇게 무서운 분이셨단 말입니까?”

“그럼,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 아무튼 아랫사람들은 끔찍하게 생각해 줬던 건 사실이야. 누구든 그 사람 부대에만 가게 되면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왜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다면서 좋아했는데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사람 진짜 거짓말 같이 왜놈 토벌대 오는 걸 미리 알아맞히더라니까.

그러니까 잠을 자다가 새벽에 불의 습격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 그거면 됐지, 그때 우리가 거기서 뭘 더 바라겠나. 또 그 산속을 돌아다니면서도 여자들 그거 하는데 쓰는 것까지 챙겨 주고. 한 마디로 사람은 괜찮았어,”

 

당시 동북 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는 30여 명의 여대원들이 있었다. 물론 동만에 있었던 유격근거지들이 해산되면서 따라 온 여자들이다.

박록금이, 최희숙이, 이경희, 김확실이, 김정숙이, 김은하, 문정숙 등이다.

정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대원도 세 명이나 되었다. 김정숙이 문정숙이 박정숙이다.

그래서 정숙동무, 하고 찾으면 세 명 함께 대답하는 일도 있었기에 각각 별명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문정숙이는 늘 퍼런 옷만 입고 다닌다고 하여 “퍼렝이 정숙이” 박정숙이는 잘 때 코고는 소리가 너무 씩씩 거린다고 하여 “씩씩이 정숙이” 김정숙이는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하여 “깜장정숙이”라 불렀다.

 

여기에 연길현 어느 산골에서 입대한 김혜순이라는 여대원도 있었다. 바로 지금 내 앞에서 이야기를 하시는 이 할머니다. 30여 명 여대원들 중에서 제일 예뻤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눈에 들었고 언제인가 결혼하기로 약조까지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북에서 출판된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어느 페이지에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6사 부대가 1936년 5월 마안산 부락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예공연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북에서 말하는 “피바다”의 원형 단막극 “혈해지창”이다.

그때 김혜순은 남달리 예뻐서 딸인 갑순이 역을 했고 주인공인 어머니 역을 한 여자는 “따곰” 강위룡의 첫 부인인 “빨찌산의 여장군” 김확실이었다. 아들 역은 박녹금의 남편 이응만이다.

그때에는 그래도 아직 항일의 열기가 한창이던 때여서 마을에 주둔하면 언제나 연예공연도 하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도 하고 노래도 배워주는 등 여유를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1939년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항일연군에 대한 대토벌을 강행했다.

 

길림에 이른바 (노조에 토벌사령부)라는 것을 설치하고 정규군 병력만 7만 여명에 거기에 자위단, 경찰, 산림대 등 방대한 무력을 총동원하여 “동만 치안숙정”에 들어갔다.

 

결국 1940년에 들어서면서 동북항일연군 각 부대에는 엄혹한 시련이 닥쳤다.

일제는 실제로 이들이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하게 추격해 왔고 그 속에서 동북항일연군 각 부대들은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런 와중이고 보면 김일성이 속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1940년 2월에는 1로군 군장이었던 양정우가 제1방면군을 이끌고 몽강까지 갔으나 거기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또 3방면군도 화전, 교화 일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나 그 역량은 이미 삼분의 일도 남지 않아 사실상 사분오열이 되고 말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4사 참모장까지 했던 박득범이 변절하고 1군 선전부장이었던 오성륜까지 투항하였다.

 

김일성은 나름대로 제2방면군을 이끌고 1940년 3월 홍기하 전투까지 치렀으나 그 후 부대는 토벌대의 포위 습격, 떨어질 줄 모르는 추격전에 걸려 역량은 하루가 다르게 쇠진하여 갔다.

하여 김일성도 어쩔 수 없어 안도의 깊은 오지인 화라즈 밀림에 숨어 잠시 숨을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서 김일성은 김정숙에게 멀리 무송에 떨어져 있었던 참모장 임수산을 데려 오라 하였다. 김일성은 그 전해에 무송을 떠나면서 다시 돌아 올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 참모장 임수산과 독립 영(영이란 대대인데 그때 임수산과 함께 남아 있은 건 불과 15명 뿐)을 남겨두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김정숙이 갔다 와서 이상한 말을 했다.

 

임수산이 곧 돌아오겠다고 하는데 도중 필요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 밀정을 끌어들여 거래하더라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항일연군에서는 이런 거래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임수산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참모장이고 또 그때까지 모든 곤란을 헤치고 잘 싸워 온 사람이었기에 상황이 그러니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랬지만 김일성은 역시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김정숙이 임수산에게 갔다 온 다음 갑자기 밀영을 옮겨야겠다고 하였다. 그때까지 있던 자리에 너무 오래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밀영을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것은 역시 김일성인데 누가 막겠는가. 그로부터 약 30리쯤 떨어진 곳에 들어가 새 밀영을 짓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며칠이 지나 새 밀영이 완성되어 갔다.

 

기본 대원들은 거의 모두 그쪽으로 가고 본 밀영에는 여대원들과 부상병들만 몇 명 남아 있던 어느 날이다.

김일성이 전문섭과 지봉손 연락병 두 명만 데리고 그곳에 나타났다.

이제 2. 3일이만 있으면 모두 새 밀영으로 가겠는데 밥을 지을 사람이 없어 김혜순이를 데리려 왔다는 것이다.

 

누구도 달리 생각 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혜순이 독감에 걸려 고열에 떨며 되게 앓고 있었다.

김일성이 그런 김혜순이를 보고 난감해 하는데 김정숙이 난딱 앞에 나서며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김일성은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김일성은 그날 김정숙만 데리고 떠났다.

 

그러나 그것이 천만 뜻밖에도 김혜순이과 김정숙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영원한 갈림 길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이튿날 새벽, 뜻밖에도 밀영에 참모장 임수산이 나타났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무송에 떨어져 있던 독립 영 대원들을 전부 데리고 나타났다. 물론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김정숙이 며칠 전 그곳에 갔다 왔고 곧 그들이 곧 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수산은 그새 이미 변절하여 왜놈의 개가 된 다음이다. 김정숙에게서 그곳에 본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임수산은 이미 만단의 준비를 하고 왔다. 앞에는 자기가 데리고 있던 대원들만 데리고 나타났지만 뒤에는 수 백 명의 일제 토벌대들을 끌고 온 것이다.

보초조차도 의심하지 않고 들여 놓았다. 임수산이 앞장서 들어오며 한마디 했다.

 

“어 춥다. 김일성동무랑 다 잘 있는 거지?”

“예.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새벽에 온 겁니까?”

 

보초을 서던 이두수가 의심 없이 하는 말이었다.

“그래, 일이 그렇게 되었어.” 임수산이 방으로 들어왔다.

“왜 혜순이 어디 아픈 거야?” 임수산이 그때까지도 열이 채 떨어지지 않아 누워있는 혜순이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예, 하지만 밤을 지내고 보니 좀 나은 것 같습니다.”

혜순의 일어나 앉으며 대답했다. 따라온 전 독립 영 다른 대원들도 별다른 동정 없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여러 해 함께 싸워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다는 사람들은 안 보여? 모두 어딜 간 거야?”

임수산이 다시 묻는 말이었다. 한 대원이 그새 모두 다른 곳에 새 밀영을 짓고 나가고 자기들도 며칠 안으로 가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총소리가 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왜놈들이다”

이두수는 그때에야 산 아래 쭉 깔려 올라오는 일본 토벌대들을 보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모두들 총을 잡는데 어느새 임수산이 먼저 총을 내들었다.

 

“가만들 있어,”

엊그제까지 한 가마 밥을 먹으며 십여 년 함께 풍찬노숙한 임수산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두들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데 임수산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이미 너희들의 참모장이 아니다. 나는 이미 포기했으니 너희들도 포기해라. 어떤 일이 있어도 목숨만은 지켜주마”

때를 맞춰 수백 명 왜놈 토벌대가 확 쓸어 들어왔다. 그렇게 되어 남아있던 열일곱 명 모두가 총 한 방 쏴보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그 길로 안도 현성에 끌려 내려갔다.

놈들이 묻는 건 처음부터 단 한 가지 김일성의 본대가 어디 갔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김일성이네는 다른 곳에 밀영을 짓고 나갔다기에 멀리 간 줄만 알았던 모양이다. 사흘 만에 누군가 불어 쫓아갔는데 그때는 벌써 행차 후 나발이었다.

 

그때 다른 사람과 달리 김혜순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일가 식구 십 여 명을 일제토벌에 빼앗기고 또 십 여 년 싸우다가 왜놈토벌대에 잡힌 것만 해도 기막힌데 임수산이 그에게 치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 봐라, 우리가 일제를 때려 부수고 나라를 광복하겠다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지금 형세를 봐라. 일본이 이제는 중국을 다 먹고 소련까지 넘보고 있다. 김일성도 시간문제일 뿐, 이제 일본을 이길 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공연히 아까운 청춘만 버리지 말자, 그러니 나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아들 딸 많이 낳고 잘 살아 보자.”

 

임수산이 말이었다. 물론 함께 잡혀 내려간 다른 사람들도 곤욕을 치뤘다. 하지만 혜순이 제일 난감했다. 임수산이 전에는 그의 상관이었지만 그 때부터는 원수 중의 원수인데 그의 말이 귀에 들어 올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수산이 이제 자기가 김일성을 잡으려 나갔다가 열흘 후에 온다면서 그때까지 결심하지 않으면 일본군대 위안부로 팔아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혜순은 기가 막혔다. 하루하루 날은 가고 임수산이 돌아오겠다던 날도 다 되어갔다. 일본군은 임수산을 봐서 그러는지 혜순이 병영 앞 개울가에 빨래하려 나가는 것까지는 허락해 주었는데 어느 날 만 가지 시름에 잠겨 개울가에 앉았다가 웬 청년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처음 보는 모습은 아니었다.

 

수비대 감방에 갇혀 있을 날부터 매일같이 보는 모습이었다.

허름한 양복차림에 도시락을 옆에 끼고 매일 아침에 가고 저녁이면 돌아오는 청년이다.

혜순이 문득 생각되는 것이 있어 무릎을 쳤다.

 

(그래 저 사람이다,)

한달음에 달려가 그 청년 앞을 막았다.

“저 미안하지만 제 말 한마디만 듣고 가세요.”

“무슨 일인데요?”

“긴 사연을 다 말할 수는 없고 저, 저와 결혼해 주세요.”

“예?”

청년은 마치 낮도깨비라도 만난 것처럼 깜짝 놀랐다.

“글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그러는데 저와 결혼해 주세요. 그것도 오늘 중 당장 말이에요”

 

처음에는 무슨 농인 줄 알았는데 혜순이 신중한 낯빛에 그 청년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청년이 쭈물쭈물 말했다.

자기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데 집이 몹시 가난하다. 자기는 마을 소학교 사서인데 그래도 괜찮냐고 했다. 혜순은 눈물이 글썽해 머리를 끄떡였다. 그럼 집에 가서 아버지와 의논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날 저녁 마침내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가난도 하지만 벼락 잔치인데 뭐가 있겠는가.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 놓고 결혼식이라고 치뤘다.

알고 보니 그 젊은이 아버지도 한때는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결국 그 곳에 주저앉은 사람이었다.

결혼 첫날밤, 신방에 혜순이 먼저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갑자기 끓어오르는 설움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데 청년이 들어와 어쩔 줄 모르고 서있었다.

혜순이 한 동안 넋 잃고 울다 젊은이에게 털어 놓았다.

 

자기는 항일연군에서 십 여 년 싸운 사람이다. 또 김일성과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한 사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뜻하지 않게 변절자에게 잡혀 왔고 이렇게라도 결혼하지 않으면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팔려가게 된다. 김일성의 행방을 알게 될 때까지 만이라도 자기를 다치지 말아 달라. 젊은이는 물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임수산이 사흘 만에 돌아와 천길만길 뛰었으나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은 그 후 실로 2년을 한 방에 살면서도 남들 보기에만 부부로 지냈을 뿐이다.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알게 될 줄 알았던 김일성부대 소식은 들을 길이 없었다. 들리는 소문은 어느 산중에서 토벌에 죽었다는 말 뿐이었다.

 

그렇게 되어 결국 혜순은 세월의 흐름에 져서 그 사람과 3년 만에 부부 연을 맺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때 또 한 번의 최대의 위기를 모면한 김일성이 본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실로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나름대로 1940년 가을까지는 견디었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 오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여기저기서 계속 이탈자들과 배신자들이 생겨나고 부대가 더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이렇게 되자 당시 심장병으로 돈화의 수림 속에서 치료받던 제1로군 정치위원이며 남만 성위 당 서기었던 위중민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

 

일부 노약자들과 부상자들, 그리고 의지가 약한 자들부터 먼저 국경을 넘겨 소련에 보내라는 것이었다.

지시를 받은 김일성은 노약자, 부상자들 뿐 아닌 전 대원들을 데리고 소련 국경을 넘었다.

전 대원이라 해야 겨우 20여 명 남은 사람들이다.

 

거기서 얼마 후 이들 모두는 소련군 극동군 사령부 산하 제88국제여단에 편입되었다.

소련 붉은 군대 규정에는 소대장이상 군관들은 모두 결혼하여 가정을 가질 수 있었다.

최현이는 김철호하고 결혼하고 최용건이는 왕옥환이와 김순옥은 교귀하, 김백문은 주보중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김일성만은 혜순이를 잃고 혼자였다. 어느 날 최현이 김일성을 찾아왔다.

 

“이제 혜순이는 잘못된 사람이고 그러니 어쩌겠소. 달리 방도를 찾아야 할 게 아니오?”

“그래, 그야 그렇겠지”

김일성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미 잘못된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고 누구 여기 남은 여대원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 없소?”

“글쎄 최현동무 보기에는 정숙이가 어떻소?”

“뭐 정숙이? 어느 정숙이 말이오? 깜장정숙이?”

김일성은 머리를 끄떡였다.

 

사실 김정숙은 그때까지 사령부 경위중대장이었던 지갑룡이와 결혼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갑룡이 오백룡과 함께 식량공작을 나갔다 토벌대와 조우하여 전투를 벌이다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

“에이그 그 쬐고 맣고 가무잡잡한 걸 어디 볼 곳이 있다구” 최현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글쎄 그 동무 키는 작고 가무잡잡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 동무의 혁명성에야 문제되는 게 없지 않소.”

김일성이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말하는 것이었다.

“글쎄 그거야 그렇지만. 알았소. 내 가서 말해 보지” 최현이 그길로 김정숙이한테 갔다.

 

원래 김정숙이로 말하면 김일성이 이끌던 6사보다 최현이 이끌던 4사 1연대에 오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최현을 실은 작은 아버지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최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말하였다.

“야 정숙아 김일성이 너하고 살자고 하더라. 너 이제부터 그와 살아야겠다.”

그러자 정숙이 왕왕 울면서 하는 말이

“아니 그래도 그 사람 아직 잘못되었다는 게 확실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런데도 최현이는 막무가내였다.

 

“그 친구 살아있으면 아직 오지 않겠어? 잘 못되었으니 오지 않는 거지. 잔소리 말고 무조건 같이 살아”

그래서 김혜순이 대신 김정숙이 김일성과 결혼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들이 결혼하고 한 열흘 되어서 만주에 공작 나갔던 사람들이 죽은 줄 알았던 지갑룡이를 데리고 왔다. 이런 난감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던 차에 마침 만주에 다시 나갈 일이 생기었다.

돈화 오지에서 심장병 때문에 떨어져 있던 1로군 정치위원 위중민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지갑룡이 자기가 나갈 차례도 아니었지만 제가 나가겠다고 자원하여 나섰다. 하여 지갑룡이 책임자가 되고 김익현이 왕 무엇이라는 중국사람 셋이 만주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셋은 돈화 오지에 나가 석 달 가까이 헤맸다.

하지만 위중민은 찾을 수 없고 식량도 떨어지고 어느 날 아침 지갑룡이 말했다.

 

나는 산에서 내려가겠다. 하지만 일제에 변절해서 내려가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산골에 숨어 감자 농사나 지으며 조용히 살겠다. 내가 이제 소련으로 다시 들어가면 김일성도 딱하고 나도 딱하다. 그러니 차라리 어느 조용한 산골에 가서 농사하는 게 낫지 왜 소련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말이냐,

너희들의 총은 내려가다 저 아래 보이는 다리 밑에 걸어놓고 가겠으니 그리 알아라, 하고 그는 떠나갔다.

 

하지만 훗날 그 작은 소원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의 얼굴을 잘 아는 일제 밀고자의 눈에 뛰어 잡혀 총살당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되어 결국 김일성은 김정숙과 살게 되고 김혜순은 다른 생각지도 않던 남자와 살게 된 것이다.

 

“저 그렇다면 투사 동지는 이후 다시 수령님을 뵐 기회가 없었습니까?”

“글쎄? 하여간 사람의 운명이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야”

 

노 투사는 다시 회상에 잠기었다.

 

1945년 11월 어느 날, 나라가 해방되고 가는 곳마다 아직 그 기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밤에 낮을 이어 새 조국 건설을 외쳐대던 때다.

평양에서는 북조선 민주여성동맹 창립대회가 있었다.

바로 그날 저녁, 김일성이 각 도에서 올라온 여성 대표들을 자기 집에 불렀다.

식사라도 한 끼 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싫어 할 사람은 없었다.

 

그때 김일성의 집은 지금 말하면 당중앙위원회 조직위원회 청사 뒤 집, 즉 사적 관으로 되어 있는 바로 그 건물이다.

김정숙이 옛날부터 유명한 평양 메밀냉면을 말아 내왔다.

모두는 웃고 떠들고 한껏 부풀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 할 무렵이었다.

 

“자 이젠 여맹까지 창립해 놓았는데 어떻게 그냥이야 헤어지겠소. 노래나 한 마디씩 하고 헤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상좌에 앉았던 김일성이 하는 말이었다. 당연히 모두들 좋다 왁작 떠들며 오락회를 시작하였다. 워낙 사람이 많은데 비해 작은 방이어서 김일성은 윗방에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큰 아래 방에 둘러앉았다.

 

한사람씩 일어서서 노래를 하는데 모두 제멋대로들이다.

누구는 일어나서 제법 흐드러지게 “양산도”를 부르는가 하면 또 누구는 “눈물 젖은 두만강”또 누구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부른다.

그렇게 내려가다 보니 함경북도에서 올라 온 여성 대표 차례가 되었다.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뒷자리에만 피해 앉던 그 여성이 일어섰다.

 

다난한 세파에 부대끼며 적지 않게 거칠어지긴 하였으나 역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뜻 한 얼굴로 노래를 불렀다.

 

내 고향을 떠나 올 때 나의 어머니

문 앞에서 잘 다녀오라

눈물 흘리며 하시던 말씀

아 귀에 쟁쟁해

 

우리 집에서 멀지 않게 조금 나가면

작은 시내 졸졸 흐르고

어린 동생들 뛰 노는 모습

아 눈에 삼삼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윗방에 앉아 듣기만 하던 김일성이 불쑥 상반신을 일으키고 노래하는 사람의 얼굴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산에서 싸울 때 제일 즐겨 불렀다는 “사향가”라는 노래였다.

 

노래 부르던 사람도 끝내는 끝을 맺지 못하고 펄쩍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흐느껴 우는 여인의 어깨가 물결쳤다.

모두들 영문을 몰라 얼굴만 쳐다보는 속에 오락회는 끝났다.

모두들 신발들을 찾아 신고 나오는데 그 여자도 어느새 마음을 진정한 듯 조용히 뒤에 따라 섰다.

바로 그 때 김정숙이 따라 나오며 그 여인의 치맛자락을 당기었다.

 

“언니는 좀 있다 가래”

그 여인은 마치 가까스로 견디어 오던 마지막 탕개라도 풀린 듯 펄쩍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왕왕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난 방에는 무거운 침묵만 떠돌았다.

“혜순동무 여기 좀 들어오시오,” 김일성이 말하였다.

여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마치 막혔던 물목이라도 터진 듯 더욱 소리 내어 울었다.

 

“장군님. 왜 그때 정숙이만 데려가고 전 안 데리고 갔습니까. 그 잘난 독감이 뭔데, 그 잘난 독감이 뭔데. 아 흑”

그가 바로 몇 년 전 안도현 화라즈 밀림에서 임수산에게 잡혀갔던 김혜순이었던 것이다.

 

김혜순이 북받치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우는데 간간히 들리는 그의 절규는 너무나도 가슴 찢어지는 소리었다.

“그 때 절 데리고 갔더라면 지금쯤 저도 얼마나 떳떳하게 이 날을 맞았겠습니까. 아 으흑...”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김일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돌아오자 동무 소식부터 알아봤소. 정말 섭섭하더구만, 동무가 시집가서 아이 낳고 살았다고 해서 내 섭섭해 한 게 아니오. 나도 그새 정숙이와 살아 아이를 보았으니까.

동문 십여 년간 산에서 싸우면서 우리한테서 배운 게 뭐요? 조그맣게 라도 조직이나 하나 꾸리고 혁명을 계속했더라면 내가 그렇게까지 섭섭하지는 않았을 거요. 정말 섭섭하오” 김일성이 목소리도 한껏 잠겨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혜순이는 단 한 순간의 운명의 오차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뀐 것이 너무 원망스러워 울고 또 울었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한다면 그 후 임수산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원래 임수산은 몇 안 되는 인텔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격대로 들어가기 전 일본에 가서 유학까지 하였고 항일유격대 조직 초기 연길 중심현위 당서기도 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 항일연군에서 중책을 유지하였다.

 

특히 1936년 이후로는 김일성의 제1로군 제2군 6사에서 오랫동안 참모장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도 끝내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회유를 이기지 못해 1941년 1월에 어느 날 변절하였고 이후 유격대 토벌에 앞장섰다.

그러던 그였지만 해방이 되고 일제가 패망하자 결국은 끈 떨어진 호박신세가 되고 말았다.

 

46년인가 47년인가. 유경수와 오백룡이 무슨 일이 있어 혜산에 갔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거기 장마당에서 우연히 임수산이를 만날 줄이야.

 

중국에서 아편을 실은 달구지를 끌고 나왔다가 바로 그들에게 걸린 것이다.

유경수와 오백룡이 그 때문에 겪은 여러 사람들의 피눈물을 생각하고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해 그 자리에서 쏴 죽였다 한다. 임수산의 운명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이후 김혜순의 운명도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해방직후 한때 그는 함경북도 도 여맹위원장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간부 신원요해사업이 심화되면서 결국은 혜순이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가 임수산이 때문에 토벌대에 잡혀 내려갔을 때 그들이 내민 귀순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물론 그때는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했겠지만 간부 이력서에는 그런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도 여맹에서 군 여맹으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농촌으로 결국 별 볼 일없는 시골 아낙네로 묻히고 말았다.

 

아니 별 볼 일 없는 농촌 아낙네 정도가 아니라 일제에 귀순한 여자였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감시 대상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혜순은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오직 불우한 자신의 운명만을 탓했을 뿐이다.

 

김일성 생일 70돌 때였다.

김일성이 다른 항일 투사들과 이야기하다가 혜순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그에게도 다른 항일 투사들과 꼭 같은 대우를 해주라는 교시를 내리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때어서 그의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랬고 그조차 별 볼일 없는 농촌 할머니가 다 된 다음이었다.

 

그의 아들딸들은 자기 어머니가 한 때 김일성과 함께 산에서 싸웠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어쩌면 자기 어머니가 김일성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번 하였고 자기들조차 황태자로 태어났을 번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구나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그들에게 김일성의 교시가 떨어졌으니 비록 늦기는 하였지만 아들딸들은 모두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고 김혜순이도 평양으로 올라왔다.

 

이야기를 맺는 여 투사의 얼굴에서는 흘러간 세월에 대한 회환의 눈물이 구슬같이 맺히었다. 인간의 운명이란 참으로 이런 것인가. 만약 그때 그 화라즈 밀영에서 김혜순이 잡히지 않고 김일성이 잡혔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노투사의 집을 나서는 나의 머리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됐다.

 

 

 
 태그:장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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